초서의 시대에 벌어졌던 백년전쟁은 봉건주의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흑사병이 창궐하고 교회의 부패로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초서가 살았던 당시의 언어는 세 가지로 영어와 라틴어, 프랑스어였다.
1. 봉건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백년전쟁과 흑사병
1) 백년전쟁
초서는 1337년부터 시작해 1453까지 이어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의 전반부에 일생을 살았다. 두 왕조가 5대에 걸쳐 116년이라는 시간을 싸운 장기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왕정과 봉건주의 체제의 쇠퇴를 가져왔다.
봉건사회에서 장원은 경제생활의 기본 단위였다. 봉건 지배층이 영유한 봉토는 여러 개의 장원의 집합체였는데, 장원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원은 영주의 재산이며 그의 수입원이었다. 하지만 농민 측에서 장원은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터전이었다. 영주는 농민에게 경작할 토지를 제공하고, 농민은 그 대가를 공납과 부역으로 갚았다.
초서의 시대에 와서는 이와 같은 영주와 농노 간의 관계가 큰 변화를 겪는다. 장원을 존속케 할 만한 사회 기본 조건들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상업의 부활은 화폐경제와 도시의 시장활동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화폐가 유통됨에 따라 농촌의 자급자족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농산물이 시장에서 매매되면서 장원이 외부와 접촉하고 이로 인해 장원의 폐쇄적인 구조가 깨진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옛날과는 다른 농촌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째, 그동안 영주에게 지불해 왔던 부역과 공납이 현금으로 대체되었다. 둘째, 전쟁 기간 동안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땅들이 영주들에게 경제적인 파탄을 이르게 했다. 영주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의 일부를 분할하여 임대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소작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셋째, 흑사병으로 인구가 3분의 1이 줄었다. 이것은 노동인구의 감소와 임금의 상승을 초래했다. 영주들이 소작인들에게 의존하면서 소작인들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게 되었다.
2) 흑사병
영국에 흑사병이 처음 퍼진 것은 1348~1349년이었다. 감염된 사람들은 삽시간에 쓰러져갔다. 의사들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14세기 영국 인구의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토록 많은 죽음의 직접적인 결과는 노동력의 감소와 그에 따른 임금 인상이었다. 역병은 재화나 재산에는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인구만 감소시킨다. 그 결과 재화는 공급 과잉 상태가 되었고 시장은 크게 위축되었다. 노동력이 심각하게 줄어들어 가자 농촌에서는 많은 농노들이 자유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신분의 자유를 비롯한 온갖 유혹에 이끌려 도시로 떠나갔다. 영주들은 이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여러 가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2. 존 위클리프의 종교개혁
영국을 비롯한 서구 중세인들의 정신적인 삶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사람들은 교회에 소속되어 출생했고, 교회 의식으로 결혼하고 또 죽었다. 대체로 국민 대부분이 신앙심이 깊었다. 하지만 교회의 부패와 폐해와 더불어 다양한 요인들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가 동요의 상태에 놓이게 되자 옥스퍼드의 학자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가 개혁의 선구자로 나섰다. 그는 교회의 부와 사치를 공격했다. 모든 교회의 재산은 세속 권력의 재량에 따라 보유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교회에 관한 그의 이론은 교회 재산에 관한 그의 저술에서 처음 개진된 지배권 이론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다. 진정한 지배권은 하느님에게만 속하며, 인간은 하느님의 지상 대리인으로 행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적 생활방식을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성경이 무식한 사람들의 손에 함부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위클리프는 보통 사람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을 마음대로 가져야 한다는 그의 신념으로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권의 성경을 펴냈다. 위클리프의 제자들은 그의 이론을 영국 전역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3. 초서 시대의 영어
제프리 초서는 런던의 시민계급 출신이다. 그의 생년월일은 확실하지는 않다. 그가 1386년에 참여한 한 재판에서의 증언을 근거로 1340년에서 1345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신의 나이는 40세이고 27년 전에 프랑스 전쟁에 참가했다는 진술로 미루어 보아 1343년이 가장 근사한 것으로 본다.
초서의 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어린 시절 학교에서 사용되던 언어가 프랑스어였기에, 프랑스어를 배운 것은 확실하다. 중세 교육의 기초인 라틴어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의 출처로서 라틴어 원전보다 프랑스어 원전을 즐겨 사용했다. 이것으로 보아 라틴어는 프랑스어만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서 시대의 영국에는 영어 외에 두 가지 외국어가 공히 쓰이고 있었다. 교회 및 식자들의 언어였던 라틴어는 만국 공용어로서 주로 갖가지 문서를 작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각 시대의 연대기, 신학자들의 소책자, 과학적 논문들이 라틴어로 쓰였다. 다른 하나는 궁정의 언어인 프랑스어였다. 프랑스어는 법정의 소송 절차에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모든 행정업무에 사용되고 있었다. 초서의 동시대인인 존 가워는 그의 첫 번째 시를 프랑스어로 썼으며, 두 번째 작품은 라틴어로 썼다. 당시에는 이처럼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 두 언어로 작품을 남기지 않은 사람은 초서뿐이었다. 1385년까지는 프랑스어에 대한 지식이 신사가 되기 위한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였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가 영문학 최초의 주요 작품으로 꼽히는 이유는 이 작품이 영어로 인쇄된 최초의 책이기 때문이다. 초서가 자신의 시의 매체로 영어를 택한 것은 시대의 조류를 따른 것이었다. 라틴어는 14세기 영국에서 그 토대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위클리프의 성경번역이 결정타가 되어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어 역시 14세기말에 가서는 활력을 되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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