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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갑신정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의 3일 천하

by Amy_kim 202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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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입니다.

 
조선은 19세기 중반부터 서양의 문명과 기술적 발전에 뒤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제국을 건국하게 된 고종은 근대화를 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당시 보수적인 관료와 양반층으로부터의 반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의 개국 축하연이 예정되어 있던 날이었습니다. 고종이 우정국에서 대외 관계를 맺기 위한 개국 축하연을 위해 외국 대사들과 함께 우정국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급진개화파들이 이를 노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고종을 감금시키고 폐위시켰습니다. 그리고 쿠데타의 주도자들은 갑신정부를 수립하여 대한제국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왕의 신변을 장악하자, 곧바로 14개조 개혁안을 발표합니다.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들
갑신정변 대표 인물들

갑신정변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들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이 있습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정변을 일으킨 것이죠. 당시 서재필의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서재필은 10대, 박영효와 홍영식은 20대, 김옥균은 30대였습니다. 이들은 잘 나가는 집안의 자제들이었는데도, 기존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꿈을 꿨습니다. 그들의 꿈은 14개 조 개혁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 온건개화파 :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아, 중국의 몸은 그대로 두고 서양의 발달된 기술만 받아들이겠다.
즉 천천히 변화하겠다
- 급진개화파 : 전면적으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자,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정치제도와 법률제도까지 바꿔서 서양 국가들처럼 되자고 주장
 

<14개 조 개혁안>
1. 청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고,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을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내의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먼저 정치면에서 이들은 조선 정부의 자주성을 천명합니다. 당시 조선의 정치는 묄렌도르프 같은 청나라 고문들이 들어와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적 국가를 세워야 한다며 청의 종주권을 부인합니다. 
급진개화파는 청의 종주권 폐지를 주장하면, 압송해 간 대원군의 조속한 귀국을 요구합니다. 일국의 지도자인 사람을 청이 인질로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갑신정변 주도자들이 생각한 자주 국가의 형태는 입헌군주제입니다. 왕은 인정하지만 왕이 곧 법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 입헌군주제는 일본 메이지유신의 산물입니다.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혜상공국은 보부상을 관리하는 행정기구입니다. 정부에서 상행위를 허가해 준 대신 보부상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가져다줬습니다. 정보도 갖다 바치고 세금도 내는 식으로 정부와 밀월관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갑신정변 세력은 투명하고 특권 없는 사회를 지향했기 때문에, 이런 혜상공국을 그냥 놔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회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분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을 내세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모두 떵떵거리는 집안의 자제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양반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얘기이죠. 사실 양반이라는 신분으로 누리고 있는 특권을 버린다는 것을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신분제 폐지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또한 규장각 폐지를 주장합니다. 정조가 설치할 때의 긍정적인 면을 잃고 변질되어 버린 규장각을 폐지하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규장각은 세도 가문들인 민 씨 세력이 고위관직으로 올라가는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14개조 개혁안이 발표되었고, 셋째 날 고종이 서명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서명을 바로 눈앞에 두고 청나라 군대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급진개화파 대원과 소수의 일본 군대, 그리고 청나라 군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숫자에 밀린 급진개화파와 일본 군인들은 퇴각하게 됩니다. 
홍영식은 고종 곁을 지키다가 칼에 찔려 죽고 나머지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실패로 끝난 갑신정변

갑신정변은 일시적으로는 일부 세력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최종적으로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입니다.
 
1. 군사적으로 불안정한 대한제국의 상황
갑신정변 당시 대한제국은 군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대한제국 군은 교전 경험이 거의 없는 새로운 군대였고, 지금의 한반도 전역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신정부를 수립하기에는 충분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2. 일부 집권세력 간의 갈등
갑신정변 당시 집권세력들 간에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일부 세력들은 갑신정부 수립을 지지하고, 다른 일부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였습니다. 이런 갈등으로 인해 갑신정부가 일으킨 혼란은 일부 집권세력들에게 이익을 제공하면서도,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혼란과 불안을 안겨주었습니다.
 
3. 외국의 개입
갑신정변 당시 대한제국의 영토는 외국인들에게 매우 민감한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은 대한제국에 각기 다른 이유로 개입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외국의 개입은 갑신정부를 거부하는 세력들에게 더 큰 자신감을 주면서, 갑신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위협하였습니다.
 
4. 국민의 불만
갑신정변 당시 대한제국 국민들은 이미 국내의 정치적인 동요와 정부의 불능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갑신정부가 발생한 후에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에 반대했고, 이를 지지하는 세력은 극히 일부였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날의 사건은 당시 대한제국의 국내 정치적인 불안과 개혁의 어려움, 서구 강대국의 영향력 증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적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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