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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아래로부터의 개혁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

by Amy_kim 202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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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한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에 일어납니다.

1884년의 갑신정변과는 1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외국의 침략과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자신의 영토로 여기고 조선의 자주권과 주권을 침해하며, 조선의 자원과 토지를 약탈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농민들은 극심한 억압과 차별을 받으며 가난과 굶주림을 겪게 됩니다.

 

이때 농민들의 굶주림과 억압에 대한 대응책으로 동학이 등장합니다. 교리를 통해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동학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인내천 사상)

동학을 창시한 인물은 최제우입니다. 그는 동학을 창시하면서 기존의 유교사상과는 달리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또한 지혜와 도덕성을 강조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권위적인 양반들의 탄압과 차별, 불공평한 세금 징수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농민들이 가난한 삶을 벗어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동학의 경전으로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있습니다. 동학은 서학, 즉 천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천주교의 성경에 해당하는 것이 동경대전, 찬송가와 같은 것이 용담유사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은 교리적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포접제라는 조직이었습니다. 포접제는 교주 아래 대접주, 또 그 밑에 접주를 두어 지역을 관할하게 하는 피라미드식 종교 조직입니다. 그래서 한 곳에서 빵 터뜨리면 다른 곳까지 확 퍼지게 되어 있죠. 이 조직이 동학농민운동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1차 농민봉기와 2차 농민봉기로 나뉩니다.

먼저 1차 농민봉기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차 농민봉기 : 반외세 < 반봉건
1892년 삼례집회 : 교조신원운동
1893년 보은집회 : 척왜양창의
1894년 고부민란 : 조병갑의 학정, 만석보
1894년 백산봉기 : 안핵사 이용태의 학정
황토현 전투·황룡촌 전투 승리 : 전주성 점령
톈진조약 : 청, 일본 개입
전주화약 : 농민군 집강소, 정부 교정청

 

1차 농민봉기의 특징은 반외세보다 반봉건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들이 움직일 때는 정치적인 목적은 없고 종교적인 목적만 있었습니다. 1892년 전라도의 삼례집회는 교조신원운동입니다. 대원군은 최제우가 백성들을 세뇌시켜 나쁜 길로 끌고 간다 하여 처형시켰습니다. 그리고 동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요. 그래서 교조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시키자는 운동이 삼례집ㄷ회에서 이뤄진 겁니다. 최제우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동학교도들이 합법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1893년 충청도의 보은집회에서는 교조신원운동에 더하여 '척왜양창의'라는 구호가 등장합니다. 척왜양창의란 왜놈과 양놈들을 배척하고 의를 내세운다는 뜻입니다. 이 보은집회부터 상당히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죠.

 

동학농민이 빵 터지는 사건은 지방관의 부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894년의 전라도 고부민란은 조병갑의 학정에서 비롯됩니다. 대효적인 학정이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둘러싸고 벌어집니다. 조병갑은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보를 하나 더 만드는데 이 보를 만드는 것도, 세금을 내는 것도 역시 농민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 공적비를 세운다고 사람들을 동원하니 농민들의 참고 참았던 분노가 터진 것입니다.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돌려 사람들을 모아 관아를 공격합니다.

 

정부는 사태 해결을 위해 파견하는 임시관직인 안핵사를 보냅니다. 이용태라는 사람이 안핵사로 왔는데, 그는 오자마자 고부민란의 주동자들을 죄다 동학교도로 몰아버립니다. 동학이 불법이니, 동학교도로 몰면 자연히 죄인이 되거든요. 이용태가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자 주민들이 들고일어납니다. 단순히 고부만의 항쟁이 아니라 전라도 전체의 저항으로 확산됩니다. 포접제라는 조직을 활용해서 농민 봉기가 들불처럼 번지는 것이죠. 이것이 1894년의 백산봉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1차 농민봉기는 안핵사 이용태의 학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

 

이들은 정부군에 맞서 사우기 시작합니다. 황토현 전투에 이어서 황룡촌 전투를 승리로 이끕니다. 마침내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합니다. 전주성이 점령됐다는 것은 전라도 전체가 농민군의 손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라도는 조선 전체가 목줄을 대고 있는 식량의 최다 생산지입니다. 우리나라 반만 년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사건이 벌어진 것이죠.

 

놀란 정부의 대책은 무엇이었을까요? 민 씨 정권은 이번에도 청나라에게 다시 SOS를 청합니다. 조선의 파병 요청에 따라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이 들어오고, 톈진조약에 의해 일본도 같이 들어옵니다. 한편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들어오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정부는 황급히 농민군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밉니다. 이것이 전주화약입니다. 이 화약에 따라 농민군과 정부는 각각 개혁기구를 설치합니다. 농민군은 집강소, 정부는 교정청을 만듭니다.

 

농민은 집강소를 통해 폐정개혁안을 단행합니다. 폐정개혁안의 주요 내용으로는 신분제 폐지, 토지 균분, 그리고 과부의 재가 허용이 있습니다. 갑신정변의 내용이 지식인들의 주장이라면, 동학농민운동은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전주화약을 통해 농민군을 해산했는데,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합니다.

이 소식을 농민들이 접하고 다시 모이게 됩니다. 이게 바로 2차 농민봉기입니다. 1차 농민봉기와의 차이점은 반봉건보다는 반외세적 성격이 좀 더 강한 것입니다.

2차 농민봉기 : 반외세 > 반봉건
남접(전봉준)과 북접(손병희)의 연합 : 우금치 전투

동학농민운동 우금치전투

이때는 더 대규모입니다. 동학 조직에는 남접과 북접이 있는데 1차 농민봉기 때는 북접 세력들은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2차 농민봉기 때는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이 손을 잡습니다.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우금치로 향합니다. 우금치는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입니다.

 

10만 명의 농민군이 일본군을 향해서 달려 나갑니다. 하지만 일본 정예군은 신식 무기로 주장하고 철저하게 훈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총탄에 수많은 농민군들이 쓰러져 나갔습니다. 결국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패합니다. 

 

 

 

 

갑신정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의 3일 천하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입니다. 조선은 19세기 중반부터 서양의 문명과 기술적 발전에 뒤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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