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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여성독립운동의 시작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by Amy_kim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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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천 번을 넘어지면 만 번을 일어서겠습니다. 한민족의 원수를 갚고

우리 가족의 원수를 갚고, 조선의 국권을 찾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우겠습니다."

여성의병장 윤희순
한말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

조국이 암울했던 시기, 타국에서 조국독립의 염원을 서슴없이 외쳤던 한말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 그는 여성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민중의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킨 시대 상황

1895년 10월, 조선의 국모가 일본 자객에 의해 시해되는 참담한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하에 경복궁으로 난입했던 일본 자객이 조선의 국모를 무참히 시해한 것이다. 이 국모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은 외압에 의해 숨죽이고 있던 민중의 저항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삼정문란과 부정부패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수탈과 외세 침략으로 민중의 울분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가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국모 시해와 함께 폐위 조치를 자행했다. 조국의 위기를 대면하고 있었던 민중의 분노는 결국 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울분을 삼키지 못해 온몸으로 시대에 항변했다. 

 

같은 해 11월, 을미사변에 이어 전국적인 단발령 시행이 내려졌다. 단발령 시행은 민중들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시대에 저항하는 대열에 앞장서게 만들었다. 예로부터 조선은 예와 도를 숭상한 나라였다. 그렇기에 단발령 시행은 분노 그 자체를 넘어 기본적인 예를 무시한 침탈의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그 어느 때보다 거세진 민중의 분노는 남녀를 불문하고 자발적 저항의 대열이었던 의병운동으로서의 적극적 참여 의지로 이어졌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오래가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하지만 이후 정미의병은 전 민족 저항운동으로 일어나며 항일 저항의 주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의병활동의 한 자락에서 일었던 여성들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위정척사운동의 진원지였던 강원 지역을 시작으로 춘천, 강릉, 진주, 안동 등지로 확산된 의병운동의 과정에서 여성의병단체를 이끈 여성이 있었다. 바로 한말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이다.

 

 

 

일본군 대장에게 보내는 조선 선비의 아내의 격문

강원도 춘천 지역에서 화서학파를 중심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의병운동을 자처했다. 그들은 주로 위정척사 계열의 지식인이었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창의의 명분을 밝힌 견문 <격고팔도열읍>이 전국 각지에 띄어졌을 때, 한 조선 여성이 일본군 대장에서 경고성 격문을 당당히 보냈다. 당시 <격고팔도열읍>의 내용은 국가의 수치를 갚기 위해 관료들이 앞장서서 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여성이 보낸 격문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당당히 꾸짖는 글로 채워져 있었다. 그 내용은 일본군 대장을 상대로 조선 침략을 강하게 비판하고, 그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훈계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 격문의 마지막에 자신을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이라고 당당히 밝혀 세상에 던진 파장은 무척 컸다. 당시 유교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윤희순은 외세에 저항하는 여성 인물로 역사에 등장했다.

 

윤희순은 조선 선비의 아내라는 당당한 문구처럼 기개 있는 글로 자신의 저항 의지를 피력했다. 당시 그가 쓴 격문에는 국가 위기 상황을 대하는 경고와 훈계가 강건한 어조로 담겨있다.

 

… 아무리 유순한 백성이라 한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알았느냐. 절대로 우리 임금님을 괴롭히지 말라. 만약 너희 놈들이 괴롭히면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더욱이 우리의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 이 마적 떼 오랑캐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거라, … 우리 후대 후손들이 너희 놈들 잡고 너희 정치를 보지 않을 것이다 … 좋은 말로 달랠 적에 너희 나라로 가거라. 대장 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윤희순의 격문 중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는 문구에서 유교사회의 틀에 예속된 여성의 사회적 입지를 넘어서서 강인한 구국 의지를 앞세운 여성의 필연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강인한 구국투쟁의 원동력

유교 집안의 여성에서 여서의병장, 여성독립운동가로 거듭나면서 끊임없는 구국투쟁을 할 수 있었던 윤희순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윤희순이 태어난 곳은 덕행과 의를 우선하고 선비정신을 강조하는 유학자 집안으로, 올곧은 인격을 갖추는 것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윤희순은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 살에 극진히 보살펴주던 계모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직접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윤희순은 일찍이 열여섯 살의 나이에 고흥 유 씨 집안의 유제원과 혼인해,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되어서야 큰아들 돈상을 낳았다. 그런데 아들의 돌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시아버지 유홍석이 춘천 의병으로 출정했다. 윤희순은 늘 존경하고 의지했던 시아버지를 따라 의병을 가겠다고 떼를 썼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집안 가사에 힘쓰고 자손을 잘 기르는 것이야말로 후대에 충성하는 것이라는 당부를 남긴다. 윤희순은 유홍석의 출정 이후 뒷산에 올라 승리를 기원하는 단을 쌓고 무사귀환을 바라는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300일 기도가 끝나는 날 유홍석이 무사히 귀가하여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을미년에 벌어진 국모 시해사건과 을미의병으로 말미암아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했던 시댁 집안어른들은 의병으로 출정했다. 그 과정에서 윤희순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시대의 변화와 집안어른들의 출정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구국의지를 굳건히 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붓 끝에 담은 구국의지

윤희순의 의병가사집
윤희순 의병가사집

처음 윤희순은 총 대신 붓 끝에 구국의지를 담았다. 오직 나라를 생각하며 붓 끝에 호국 구국의지만을 담았다. 그렇게 저작된 윤희순의 의병가사는 <왜놈 대장 보거라>, <병정 노래>, <방어장>, <안사람 의병가>등 열두 편에 이른다. 누구나 부르기 쉽게 저작하여 일반 민중이 시대에 공감할 수 있는 의병가사와 노래로 유도했다. 

 

시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사람들이 의병으로 출정하여 일본과 맞서 싸우고 있는데 안사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윤희순은 과감하게 행동에 옮겼다. 윤희순은 일본군 대장에게 격문을 보내고, 항일 의지를 담은 의병가사를 배포하여 많은 이들에게 의병운동에 관심을 갖게 했다. '구국의지를 실천하는 데는 남녀의 구분이 없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은 의병가사에 모두가 운을 붙여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가 퍼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어지러운 정국과 친일 세력이 난무했던 시기에 민중의 울분과 동요를 일으켰던 의병운동은 조선의 여인들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윤희순의 의병가사를 보면 을미의병, 정미의병, 국외 독립활동 등 시기에 따라 내용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구국활동의 주체로서 여성을 주목하고 의병의 당위성을 강조했던 것은 일관되게 드러나 있다. 초기의 의병가사는 조국의 상황을 알리며 정신적 단결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주를 이루었으며, 특히 의병가사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데 목적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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