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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하늘에서 독립의 날개를 펼친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

by Amy_kim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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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을 안고 비행기를 몰고 일본으로 날아가리라

 

나이도, 성별도, 죽음도 권기옥에게는 장벽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항일투쟁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을 택했다. 하늘에서 일제를 향해 독립의 날개를 펼친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을 기억해 본다.

 

여성비행사 권기옥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

 

 

독립 활동에 온몸을 다해 뛰어들다

권기옥의 국내 항일운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만세운동과 독립자금 모금, 그리고 일제 수탈 통치기관 폭파 임무가 그것이다. 권기옥이 펼친 만세운동과 관련된 활약은 1919년 3월 1일 평양 시내 만세운동 참여를 시작으로, 같은 해 10월 1일 숭의여학교생 주도로 이루어진 만세시위운동이 있다. 이와 더불어 권기옥은 10월 3일부터 11월 4일까지 평양 시내에서 펼쳐진 대대적인 항일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 만세시위운동으로 여러 차례 감옥을 드나들었던 그는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일에 적극 가담한 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생긴 고문 후유증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권기옥은 몸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1920년 5월 1일에 열린 장대현교회 여자 전도대 발대식에 참여하여, 민중계몽과 독립정신에 관한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임시정부로부터 일제 통치기관 폭파에 협력해 달라는 요청에 강연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때 당시 일제는 조선의 경제 침탈을 목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등을 만들어 조선인의 재산을 착취했다. 그에 대한 응징으로 나석주는 폭탄 투척으로 저항했다. 김상옥 역시 독립운동 탄압의 총본부 역할을 하던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이처럼 일제 수탈 통치기관을 폭파하는 임무에 권기옥 역시 뛰어든 것이다.

 

 

비행학교에 입학한 유일한 여학생

여학교시절의 권기옥
1921년 경 중국 항저우 홍따오여학교 시절

1920년 9월 스무 살의 권기옥은 일제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중국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권기옥은 중국의 독립운동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중국어 공부에 착수하고자 했다. 그래야만 독립운동을 위해 되고자 했던 비행사의 꿈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으로 망명했던 사람들은 난징을 선호했지만, 권기옥은 한국인이 적은 항저우를 택했다. 홍따오여학교는 초급 3년에 고급 3년 과정으로 6년제 학교였다. 권기옥은 초급 3학년에 편입하여 2년 2개월 만에 고급과정까지 모두 마칠 만큼 중국어 공부에 매달렸다. 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항공학교 진학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운남육군항공학교의 유일한 여학생인 권기옥을 위해 학교에서는 숙소를 따로 마련해 줄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학교에는 프랑스에서 구입한 스무 대의 비행기가 있었고, 수업은 프랑스인 교관이 진행했다. 탑승 적성검사는 학생 절반이 불합격할 정도로 어려웠으나 권기옥은 당당히 합격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20시간의 비행 훈련 끝에 단독 비행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반면 권기옥은 9시간의 훈련만으로도 단독 비행을 나섰다. 

운남육군항공학교 졸업장
운남육군항공학교 졸업장

1925년 2월 28일 권기옥은 운남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하여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되었다. 

 

 

 

하늘에서 일본을 향해 총을 쏘다

권기옥과 비행교관
재미 중국인 여성비행사 이월화와 이탈리아 비행교관과 함께

당시 권기옥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요시찰 대상 인물이었다. 그는 고국에서부터 늘 쫓기는 신세였지만 계속되는 어려움에 심신이 지쳐도 절대 굴하는 법이 없었다. 권기옥은 여행비행사 자격으로 10여 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였다. 심지어 중국의 혁명 공군 초창기에 비행기를 몰고 일본군에게 기총소사를 하기도 하였다. 1932년 일본군이 상해전쟁을 일으켰을 때도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고 가 일본군을 격퇴했다. 상해전쟁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은 권기옥은 중국 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용감무쌍한 권기옥의 이야기는 중국 항공위원회 부위원장 쑹메이링의 귀에 들어갔다. 쑹메이링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여 1966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장을 받은 인물이었다. 쑹메이링은 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권기옥은 남양선 비행의 마지막 순간 일본으로 기수를 돌려 황거를 폭격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성능시험 중 부주의로 사고가 일어나 일정이 연기되었다. 겨우 준비를 끝내고 출발을 앞둔 이틀 전, 일본군의 북경 근처 펑타이 점령 소식으로 결국 선전비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폭탄을 안고 일본으로 비행기를 몰고 가리라던 권기옥의 어린 시절 꿈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 버린 것이다.

 

 

 

평생을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다

1945년 8월 15일 충칭에 있던 권기옥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다. 권기옥이 완전히 귀국한 때는 1949년 5월, 그의 나이 마흔아홉 살이었다. 조국 광복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온 권기옥은 여성 최초로 1950년부터 1955년까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15년간은 <한국연감>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일로 권기옥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뿐만 아니라 출판인으로도 기록되었다.

 

권기옥은 1967년에 감옥 동지 스무 명과 함께 3·1 여성 동지회를 창립하여 여성독립운동가의 존재를 이 땅에 각인시켰다. 또 1966년부터 1975년까지는 '한중문화친선협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71년 10월에는 해당 단체의 초청으로 자유중국 정부로부터 '중화민국 비행흉장'과 '공군일급상장'을 받았다. 그 밖에도 재향군인회 명예회원, 부인회 고문을 맡는 등 평생을 사회에 봉사,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권기옥은 돈이 없어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평생 살던 장충동 집을 팔아 1억 원의 장학 기금을 마련해 놓고 생을 마감했다. 권기옥은 한 푼이라도 더 장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생 낡은 검정 한복 한 벌로 지냈다. 그리고 살고 있던 일본식 주택 아래층을 세놓고 자신은 2층 차디찬 마루방에서 기거하며 아끼고 아낀 돈으로 장학 기금을 만들었다.

그가 조국으로 돌아와 베풀었던 나눔의 삶은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이국땅에서의 여류비행사 삶만큼이나 강인하고 남다른 애국의 의지가 느껴진다.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은 1988년 여든여덟 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대통령 표창, 1977년에는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국가보훈처는 2003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권기옥 지사를 선정하여 권기옥의 업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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