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조선시대 사람들의 식량 사정, 주식과 부식

by Amy_kim 2023. 1. 26.
반응형

조선시대에는 보통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었다.

이는 산업화가 진행되기 전의 동서양이 모두 그러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항상 두 끼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낮에 적은 양의 점심을 먹은 경우도 있다. 점심은 주로 해가 길고 활동량도 많은 봄부터 가을까지 먹었다. 민간의 풍속에 첫서리가 내리면 점심 먹는 것을 그쳤다고 한다. 해가 길고 활동량이 많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밭 갈기, 모내기, 김매기 등을 활동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절적으로 점심을 먹을 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평소보다 많은 활동을 해야 할 경우에는 낮밥을 챙겨 먹었다. 예컨대 힘든 일을 하는 일꾼이나 먼 길을 여행객은 점심을 먹었다.

조선시대 식사
조선시대의 식사

식사량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많았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일찍부터 대식하는 나라로 지목되었다. 개화기에 한국을 다녀간 달레, 오페르트, 비숍 등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한국인이 매우 많이 먹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현, 이이, 조헌 등 나라 안에서도 대식의 풍습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된 당시의 식사량은 성인 남성이 한 끼에 7홉(약 0.42리터, 336그램)이고 성인 여성은 5홉, 어린이는 2홉 정도였다. 이를 평균치를 잡아 계산하면 1인당 5홉(약 0.3리터, 240그램)으로, 하루 두 끼를 먹었으므로 하루 한 되를 먹은 셈이다. 한 끼 곡물 소비량만으로 비교하면 지금의 두세 배에 이르는 수치이다. 물론 당시 상차림에는 여러 가지 반찬이 상에 오르는 일이 별로 없었음을 감안해야 하지만, 같은 시기의 주변 국가와 비교하더라도 많은 양을 먹은 것은 분명하다.

 

 

조선의 식량 사정

소나무의 속껍질도토리
송기 (소나무의 속껍질)와 도토리

조선시대에는 항상 식량이 부족했다. 농지가 넉넉하지도 않았고, 생산력도 뒷밤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곡물 대신에 여러 가지 구황식품을 식량으로 이용했다. 당시 구황식품으로는 송기, 느릅나무 속껍질, 칡, 마, 도토리 등과 함께 갖가지의 풀들이 있었다. 이런 식품들은 소금과 장이 있어야 제대로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정부가 기근에 방출하는 진휼식품에는 쌀, 콩과 함께 항상 소금이나 장이 지급되었다. 식량이 떨어지면 먹던 소나무 속껍질로 대게 곡물 가루와 섞어서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새로 보급된 작물로는 일본에서 들여온 고구마와 중국에서 들여온 감자가 있었다. 고구마는 18세기에, 감자는 19세기에 들어왔다. 고구마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남부 지방에서 주로 재배되었다. 그러나 확산 속도는 감자보다 느렸다. 그래서 아마도 고구마가 널리 보급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감자는 19세기말에 들어와 산간 지역, 북부 지역에서 빠르게 보급되어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주된 구황식품은 역시 송기, 칡, 도토리 등이었다.

 

평상시에도 식량이 모자랐지만, 가뭄 등으로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 종종 기근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기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재양이었다. 기근이 돌면 몸의 저항력이 급격히 떨어져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흉년이 들면 정부에서나 죽이나 말린 밥을 배급하기도 하고 집집마다 쌀, 콩, 장 등을 나눠주어 기본적인 식량난을 해결하게 했다. 조선시대의 기근은 많은 유민을 낳고 유민들은 도적으로 변해 사회불안을 야기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주식

조선시대 주식 쌀밥잡곡 조
쌀밥과 잡곡 조

조선시대의 주식은 쌀밥이었다. 벼는 가장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곡물이었다. 벼는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상당히 많고, 파종량에 비해 수확량도 많았다. 쌀은 조선시대에 보리, 밀, 메밀, 수수 등 여러 가지 곡물 가운데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곡물이었다. 곡물 수출입이 거의 없었던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곡물이 주식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북부 지방에서는 조를 중심으로 한 잡곡이 주식이었다. 한반도는 두 개의 농업 지대가 함께 있어서 한반도 북부 지대는 잡곡 지대였고 남부는 도작 지대였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 조선시대의 주식을 말하라고 하면 역시 쌀이었다. 

 

 

조선시대의 부식

조선시대 김치
(왼쪽) 배추와 무를 주재료로 하여 간장으로 간을 하여 담근 국물 김치 (오른쪽)고추와 고춧가루

조선시대의 가장 기본적인 부식은 김치였다. 그래서 김치는 반상 차림의 첩 수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김치의 가장 중요한 양념인 고춧가루는 18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이때부터 김치는 빨간색으로 변했다.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이기 시작한 때부터 새우 따위의 어패류로 만든 젓갈이 김치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또한 조선시대의 김치는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지금과는 달리 무를 비롯해 오이, 가지 등이 재료로 쓰였고 배추김치는 흔히 볼 수 없었다.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배추는 토착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재배량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전국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김치의 재료로 무보다 배추가 더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배추김치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19세기 후반부터라고 볼 수 있다.

 

고춧가루를 쓰기 이전의 향신료로는 마늘, 겨자, 생강 등이 있었다. 그전까지 매운맛을 내는 재료는 천초였다. 야생으로 자라는 천초는 조피나무 열매의 껍질을 말려 가루로 만든 것이었다. 서양에서 중요한 향신료였던 후추는 매우 값비싼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그다지 쓰이지 않았다. 조선에서도 한때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후추를 직접 재배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실패했다. 따라서 후추는 식품보다는 약품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통해 고추가 들어왔다. 고추는 17세기까지만 해도 그대로 사용했으나, 18세기부터는 가루로 가공해 각종 음식의 양념으로 쓰였다. 고춧가루의 사용은 한국 음식을 매운맛의 빨간 음식이 주류를 이루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