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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종의 아관파천과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단체 독립협회 등장

by Amy_kim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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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갑오개혁과 청일전쟁 이후 을미개혁의 모습

2차 갑오개혁의 시작 1차 개혁을 주도한 군국기무처는 신분제의 폐지 등과 같은 여러 개혁들을 단행하는 한편, 동학농민운동도 진압합니다. 물론 배후에는 일본이 있었죠. 군국기무처를 통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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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을미사변이 불러일으킨 을미개혁까지 살펴봤는데요.

 

홀로 남은 고종, 벌벌 떨고 있는 고종에게 러시아가 접근합니다. 우리한테 오면 안전을 보호해 주겠다고 말이죠. 명성황후도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는데, 러시아가 직접 자기를 보호해 주겠다고 제안해 온 거죠.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은 이것밖에 없다! 고종은 결단을 내립니다.

 

1896년에 있었던 아관파천입니다.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입니다. 

 

아관파천은 고종 나름의 정치 승부수였는데요.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으로 일본의 압박이 엄청나게 거세어진 상황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높여 일본과 동등하게 만들어놓았죠. 이이제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다른 오랑캐를 통제하겠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외세를 끌어들여 정권을 유지하는 데는 상당한 대가가 따르겠죠?

 

1894년이 갑오년, 1895년이 을미년, 1896년은 병신년입니다. 이 병신년부터 열강의 이권 침탈이 절정에 달합니다. 무엇보다 고종을 보호하고 있는 러시아의 목소리가 가장 크겠죠. 두만강, 압록강, 울릉도의 삼림 채벌을 가져갑니다. 절영도 조차 요구도 합니다. 절영도는 지금의 영도예요. 러시아가 절영도 조차를 요구한 이유는 자국 선박들의 남하를 위해 중간 연료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고종 때 조선과 미국 사이에 맺은 불평등한 통상 조약
1882년 고종 때 조선과 미국 사이에 맺은 수교와 무역에 대한 조약. 치외 법권을 인정하고 최혜국 조항을 넣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다른 나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겠죠? 프랑스는 광산채굴권을, 미국은 금광채굴권을, 일본은 철도부설권을 가져갑니다. 이 같은 이권 침탈이 가능했던 이유는 최혜국대우라는 조항 때문입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열강들과 맺은 조약들에는 최혜국대우라는 조항이 다 들어가는데요. 어느 한 나라가 무엇을 가져가면 다른 나라도 그에 상응하는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최혜국대우입니다. 

 

고종의 아관파천은 고종 정권을 지켜주었을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갖다 바쳐야 했던 이권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내적으로도 큰 혼란이 벌어집니다. 고종은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이끌었던 김홍집 내각을 역모로 몰아 해산 명령을 내리고, 일부 개혁 사항들은 무효 선언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김홍집이 피살되지요. 

 

고종은 재정의 일원화를 원상복구 시킵니다. 1차 갑오개혁에서 탁지아문으로 재정의 일원화가 되었는데, 이것을 원위치시킨 거예요. 왜냐, 나랏돈은 왕의 돈인데 왕이 마음대로 못 쓴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단발령을 철회합니다. 을미개혁의 단발령 때문에 나라가 들썩이고 의병투쟁까지 벌어졌습니다. 고종은 이 단발령을 폐지하고 의병들의 해산을 종용합니다. 

 

그러다가 1897년 고종은 환궁을 결심합니다. 황제의 나라를 선포하면서요. 대한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1895년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때문입니다. 청의 종주권을 소멸시킨 조약으로 인해 우리가 왕을 하든 황제를 하든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게 된 거죠. 


왕이 궁궐 하나를 못 지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면 나라는 누가 지키는가! 아관파천이 단행되자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단체가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단체라고 할 수 있는 독립협회입니다. 

 

189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다가 1898년 해산된 사회 정치 단체 독립협회
독립협회 회원들의 모습. 앞줄 좌측에서 네 번째 인물이 서재필

독립신문을 만든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세웠는데요. 이들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독립문을 세웁니다. 독립신문이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만든 거죠. 

 

독립협회는 자유 민권, 자강 개혁, 자주 국권이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겁니다.

독립협회 위원장이 누구냐 하면 이완용입니다. 그 이완용 맞습니다.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선 역적 중의 역적이죠. 물론 서재필이 중심이었지만, 전면에 내세운 것은 이완용 같은 인물이었어요.

 

독립협회에는 당시 아시아의 선진 근대화 국가였던 일본을 모델로 삼아 우리나라를 개혁하자는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급진개화파와 연결됩니다. 급진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세우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죠. 

 

독립협회는 오랜 시간 활동한 단체는 아닙니다. 대한제국의 탄압으로 해체되기 때문이죠. 1896년과 1987년에는 주로 계몽활동을 하고, 1898년 이후부터는 활발한 정치 활동을 전개합니다. 

 

 

대한제국의 개혁 내용과 독립협회의 활동은 다음 시간에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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