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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조선시대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향한 화장법

by Amy_kim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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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여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겠죠?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공통적인 특성이라 조선 시대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이나 조선시대에나 화장의 기술을 빌려 부족한 아름다움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는 계속되어 왔는데요. 

 

전통적인 단어로 오늘날의 화장을 표현하자면, 화려하게 치장하는 장식이나, 정갈하게 꾸민다는 의미의 단장이라는 말이 비슷할 것 같네요. 오늘날 화장법에 따라 다양한 용어가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화장의 단계와 진하기에 따라 쓰이는 용어가 달랐습니다.

 

신윤복의 <여속도첩>중 <연당의 여인>

<규합총서>에 이르기를 음력 8월 보름쯤 박 줄기, 수세미 덩굴, 오이, 수박 등을 땅에서 2치쯤 되는 높이 부분에서 잘라내어 며칠간을 뿌리 쪽 덩굴을 빈 병에 꽂아두면 물이 차는데 이것을 '미안수(아름다운 얼굴로 만들어주는 물)'라 부르며, 모든 화장은 미안수를 먼저 바르고 시작한다고 되어 있다.

 

담장은 피부를 뽀얗게 보이도록 엷게 화장하는 것이고, 농장은 약간의 색조화장을 더해 오늘날의 데일리 메이크업 정도, 염장은 짙은 화장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혼례를 치르거나 의식에 참석할 때 하는 화려한 응장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목욕과 세수를 할 때 녹두와 콩, 팥 등을 곱게 갈아서 세안을 했습니다. 비누 대신 곡물로 세안을 한 것인데, 일반 백성들에겐 가격이 비쌌죠. 그래서 쌀겨를 천주머니에 넣고 우려낸 물로 세안을 하거나 쌀뜨물을 받아 얼굴에 바르곤 했습니다. 겨울철에는 보습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요. 유자 씨를 찧어 달인 물로 세안을 하면 얼굴이 트지 않았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희고 뽀얀 피부를 얼마나 선호했는지는 하멜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태풍 때문에 표류해서 13년을 조선에서 지낸 네덜란드 사람이죠. <하멜 표류기>를 보면 "많은 조선인들이 우리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흰 피부를 부러워한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조선의 색조화장은 어떻게 했을까? 

우선 피부를 환하고 균일하게 정돈해 주는 가루 '분'을 발라 뽀얀 얼굴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색조화장의 첫 번째 순서였죠. 

 

눈썹을 그리는 것은 미묵이라고 합니다. 굴참나무, 너도밤나무로 만든 숯 그을음을 기름에 걸쭉하게 혼합하여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나름 유행하던 열 가지 눈썹 모양을 십미요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미인도 속의 눈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초승달이나 버들잎 모양처럼 적당한 곡선감을 지닌 모양의 여성스러운 눈썹이 선호되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눈썹을 그리고 나면 뺨을 발그레하게 표현하여 혈색을 더했습니다. 조선 여인들은 붉은 빛깔이 도는 백합의 꽃술을 말린 산단이나, 국화과 식물인 잇꽃(홍화꽃) 등에서 염료 성분을 채취하여 가루 상태로 썼습니다. 때로는 환약처럼 빚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기름에 개어 바르기도 했습니다. 

 

입술연지와 볼연지는 같은 제품을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루 상태인 것은 누에고치 집에 묻혀 두드리고, 기름에 갠 것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자연스럽게 표현했다고 하니 사용법은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죠?

조선시대 화장품 용기

 

오늘날의 향수처럼 조선시대에도 천연재료를 사용하여 향기를 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백단나무에서 나는 백단향이 여러 향기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는데요. 은은하면서도 고혹적인 향기가 지나가던 사람도 다시 한번 뒤돌아볼 만큼 매혹적인 향을 풍기게 해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여인들 사이에서는 엷게 희석한 향을 천에 묻혀서 향갑이나 향낭에 넣어 몸에 지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답게 검소하고 조신하며 정갈한 것을 아름다운 여인의 최고 덕목으로 칭송했습니다. 지나친 화장이나 요란한 치장을 경계한 것인데요.

사대부들에 의해 성리학이 더욱 강조되던 조선 중기에는, 여인이 얼굴 치장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부덕한 것이라고 여겼죠. 그래서 명예를 중시하는 양반가에서는 미안수를 만드는 수세미를 집안에 심지 않는 것이 가풍으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1775년 이덕무가 저술한 수신서

 

조선 후기 실학자로 이름을 떨친 이덕무는 선비의 작은 예절이란 뜻을 가진 <사소절>이라는 책을 냅니다. 그는 책에서 도덕과 예절이 무너져 피폐해진 사회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여인이 지나친 화장을 부정적으로 언급했는데요. "부인이 단정하고 정결함을 귀히 여긴다 함은 얼굴을 화장하여 남편을 기쁘게 함을 이름이 아니다. 화장하고 예쁘게 옷을 입은 사람은 요사스러운 여자요.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얼굴에 때가 있는 사람은 게으른 여자다"라고 썼습니다. 

 

조선시대 정숙한 여인들은 화장한 얼굴이 아닌 민얼굴이어야 했고, 화장하는 것은 기생이나 하는 것으로 보았죠.

 

하지만 아름다움을 향한 여성의 욕망은 본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화장과 가꾸기는 다른 사람에게 보다 반듯하게 보이도록 하고 내가 지닌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수준에서의 노력이었죠. 

 

보물 제 1973호 신윤복의 미인도

조선시대에 결혼상대자의 여인으로 최고의 미인은 얼굴이 둥글고, 적당한 살집이 과하지 않게 붙어 있어 마르거나 뚱뚱하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살빛이 희고 광채가 나면서 흉터나 잡티가 없는 사람이었죠. 그리고 머리가 검고 숱이 많으며 입술이 붉어서 건강하고 푸근한 인상은 주는 자애로운 얼굴과 용모를 미인상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이런 여인들은 아이를 낳는 데도 무리가 없어 건강하게 후손을 낳고 길러줄 좋은 어머니상으로 여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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