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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꼭 기억해야 할 제주 4·3 사건. 슬프고도 가슴아픈 그 날의 이야기

by Amy_kim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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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1948년 4월 3일 제주

제주 4·3을 상징하는 꽃 동백
제주 4·3을 상징하는 꽃 동백 (꽃말 기다림)

 

남로당(남조선노동당, 해방 직후 남한의 공산주의 정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요. 경찰과 군이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공식적으로 접수된 것만 1만 4천여 명. 4·3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약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확한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목숨이 희생된 사건이죠. 

 

(제주 4·3이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 제주 4·3 사건 진상 조서 보고서 中 -

 

 

4·3의 배경이 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1947년 3월 1일 기념식

4·3으로부터 1년 전인 1947년 3월 1일, 제주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말을 타고 가던 경찰이 길을 지나던 6살짜리 아이를 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 경찰이 모르고 그냥 가버리니까 다친 아이를 살피지 않는 경찰을 보고 군중들이 화가 났죠. 사람들은 말을 탄 경찰의 뒤를 쫓으며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이 모습을 본 다른 경찰들은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오인하고 총을 쏩니다. 경찰이 쏜 총에 6명이 사망했지요. 그러나 이 6명은 돌을 던진 사람들이 아니라 3·1절 기념식을 구경하던 사람들.. 그리고 당시 사건을 진압하던 경찰 중 상당수는 친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요.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의 정책 아래 친일 경찰에게 치안을 맡겨왔던 것입니다. 

 

1946년 군정경찰 간부 중

82%가 일제 경찰 출신으로 밝혀졌다.

제주 경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 제주 4·3 사건 진상 조서 보고서 中 -

 

 

이후 온 제주도민이 들끓고 일어난 거죠. 제주도민의 95%가 참여한 유례없는 대규모 파업이었습니다. 결국 3·1절 발포 사건을 계기로 총파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법원, 검찰, 관공서, 운수회사, 심지어 경찰관 66명도 파업에 동참합니다.

 

<제주도청 공무원 파업 요구조건>
①... 무장과 고문을 즉시 폐지
② 발포 책임자 및 발포 경관은 즉시 처벌
③ 경찰 수뇌부는 인책 사임
④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 보장
⑤ 3·1 사건 관련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⑥ 일본 경찰의... 계승활동을 소탕

 

사실 해방이 되었는데도 경찰들이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으니 주민들의 고통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던 거죠. 

 

외부에서 경찰들이 많이 들어옵니다. 경찰과 군대 그리고 우익 청년단체들이 제주로 오고, 고문이 심해지고.. 그러니까 이제 잡혀서 고문당하고 핍박받는 것은 시간문제니 이에 불안해진 좌익,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기를 들고일어나자" 결국 그렇게 4·3의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죠. 

 

 

(총파업에 참여한) 군중을 이용한 것이

극소수인 좌파 남로당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이용당한 사람들까지

전부 좌파로 몰아냈습니다.

- 4·3의 피해자 고봉식 님의 인터뷰 中에서 - 

 

 

정부 수립 전인 그때는 국가보안법이 없었기 때문에, 남로당(좌익)이라는 것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남과 북이 제도적으로 정체성을 선명히 한 것이죠. 해방 직후의 공간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공존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상태였습니다. 

 

특히 그 당시 좌익을 강하게 제압하려 한 이유는, 남한 단독 선거를 앞두고 이념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 자체가 무산 혹은 연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선거를 무사히 치르려면 조기에 좌익세력을 강력하게 진압해야겠다고 한 것이죠.

 

그 와중에 남한 전체를 통틀어 오직 제주도에서만 두 지역구에서 과반수를 채우지 못해 선거에 실패합니다. 그러니 이제 완전 난리가 난 거죠. '제주는 빨간 섬이다' 하고요.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에서

제주도만 유일하게 보이콧...

(이후) 섬 주민들을 청소하는 작전 착수

- 2001년 10월 24일 뉴욕타임스 보도 기사 中 -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 <포고령>

 

남로당 세력을 찾아내기 위해 48년 11월부터 초강경 진압을 합니다. 초토화 작전에 돌입한 것이죠. 전체 피해자의 80%가 이때 발생합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 지점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한 것이죠. 그러나 산간지대 주민 중에는 그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정말 사람을 그렇게 죽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산속에 숨은 무장대(좌익)와 토벌대(우익) 간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토벌대(우익)는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좌익)를 돕고 있다는 가정아래

대량 학살 계획을 채택했다

- 미군정 보고서 (1959년 4월 1일) 중에서 -

 

빌레못굴 학살 (1949년 1월 16일) 
주민 28명이 굴 안에서 숨어 지내다 토벌대에게 들킴
그중 토벌대는 3살 어린이의 두 다리를 잡고 바위에 패대기쳐 학살시키는 등 남녀노소 15명이 희생됨

 

피해자들의 진술서들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진술서의 내용이 참혹하다 보니 정부는 이 내용들을 부정할 수밖에 없죠. 아주 오랫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됐었죠. 아직도 죄 없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한 것은 모르고 그저 옛날에 제주도에서 폭동이 났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좌제 때문에 사회생활에 심한 제약을 받았던 4·3 유족들.

 

60대 노부부는 3살 손녀와 1살 손자를 데리고 급히 냇가로 피신했다.

굴을 찾아 몸을 숨겼지만 아기 울음소리가 새나가고 말았다.

진압군은 굴 속으로 수류탄을 던졌고 이들 가족은 운명을 같이 했다.

-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

 

 

... 4·3 유가족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

신원조회는 물론이고 출입국이나

각종 입학, 임용 시험 등에서 불이익을 받아온 것이다

-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

 

 

그럼 4·3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

현기영 작가의 1978년 소설 <순이 삼촌>을 통해서입니다. 오랫동안 금기시했던 4·3을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한 것입니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소설을 집필한 현기영 작가제주 4.3사건에 대한 소설 순이 삼촌을 집필한 현기영 작가
현기영 작가

 

현기영 작가는 4·3에 대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군 수사기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구타를 당하고 한 달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1979년의 일입니다. 그 누구도 이 사건을 입에 담을 수 없었습니다.

 

소설가 현기영과 더불어 4·3을 알린 화가도 있었습니다. 

제주에서 태어난 화가 강요배

바로 강요배 화가인데요. 80년대 말부터 4·3 연작을 그려 그 실체를 세상에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1990년대 초에는 사람들이 4·3을 잘 모를 때였는데요, 화보집 <동백꽃 지다(1998)>를 출판합니다. 동백꽃 지다는 현대사의 아픈 기억인 4·3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화집입니다. 4·3 사건을 다루는 이 화보집은 당시로서는 위험한 행동이었음에도 시대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사건을 공론화하는 데 기여한 것이죠. 

 


 

그렇게 세월이 지납니다.

박정희 정권이 끝나고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그리고 김영삼 정권 때까지 침묵이 계속되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 때 이르러서 이 사건이 공론화가 되고 제주 4·3 특별법이 통과됩니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2000.1.12)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그 당시에 희생된 희생자와 유가족들, 그리고 제주도민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2003.10.31)

 

 

2000년 4·3 특별법 제정으로 정부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시작했으며

2019년에는 법원이 생존 수형인에 대해 국가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

한국사 교과서 또한 개선되었다

- 4·3 추가 진상 조사 보고서 中에서 -

 

4·3 당시 불법 재판을 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거나 수형인 희생자만 2,0000여 명.

 

그럼 당시에는 무슨 근거로 형을 집행?

4·3 기념관에 보관된 고등군법회의 명령이라는 문서를 보면, 내란죄로 붙잡아 온 몇백 명의 이름을 써놓고 항변은 모두 무죄. 이 항변에 대한 판결 이유는 유죄. 이것이 다입니다. 이유가 없어요. 

 

제주도 계엄지구 고등군법 회의 명령 제20호 (제주 4.3 바로세우기)

 

  • 항변 : 전 피고인은 각 죄와 범죄 사실에 대하여 무죄를 주장
  • 판결 이유 : 전 피고인은 각 죄와 범죄 사실에 대하여 유죄 

 

심지어 이런 판결문을 가지고 두 달안에 형을 집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4·3 당시 판결문을 대신했던 명령문..

죄 없이 끌려온 것도 모자라 정당한 재판도 받지 못한 주민들. 

 

2021년이 되어서야 4·3 당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335명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전국의 형무소로 끌려간 뒤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된 사람이 333명입니다.

몇천 명의 사람들이 재심 재판을 받았지만 돌아가신 분들은 몇 만 명입니다. 지금이라도 재심을 받는 사람들은 정말 소수이죠.

 

우리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4·19 혁명, 광주 5·18, 6월 민주화 항쟁 등. 

그중에서도 제주 4·3 사건은 가장 가슴 아픈 사건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같은 국민이 같은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폭압의 역사. 70년이 지나도록 이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더 가슴이 아픈데요.

 

역사는 존재의 기록입니다. 한 시대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4·3의 역사는 반드시 정립되어야 합니다. 

 

 

 

4·3평화공원| 공원소개|

제주4·3평화공원은 4·3사건으로 인한 제주도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인권기념공원입니다. 제주4·3평화공원 조성

www.jeju43pea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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