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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민족영웅 안중근의 위대한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by Amy_kim 2023.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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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들과 나는 국민 된 의무를 다한 것뿐이다.

 

조마리아 여사

 

죽음을 앞둔 안중근에게 어머니는 자신의 애끓는 슬픔을 숨긴 채 글을 써 보냈다.
"나라를 위해 딴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졌다는 대의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 의연한 죽음을 택할 것을 요구한 어머니는 자식의 위대한 스승이었다. 

 

 

안중근의 소리 없는 든든한 조력자 

안중근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어머니 조마리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박영효, 김옥균 등화 갑신정변에 참여한 개화파 지식인으로, 인물 조명이 가능한 자료들이 더러 있으나 상대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료가 빈약한 것은 시대적으로 볼 때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사회 문화구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6년 1월 남편 안태훈이 사망하고 안중근이 본격적인 독립활동을 전개하면서부터, 조마리아의 행동영역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조마리아는 남편의 충실한 내조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가 타계한 후에는 애국계몽 사업에 뜻을 둔 안중근을 따라 개화운동이 활발했던 삼화항으로 이주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아들을 도와야겠다는 각오를 한 조마리아는 기꺼이 안중근의 뜻에 함께 했다. 안중근이 해외 망명을 추진할 때는 "집안일은 생각하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안중근은 국채보상회 관서 지부를 설치하고 지부장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조마리아 여사 또한 자신이 가진 패물을 모두 내놓으며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부했다. 

 

 

 

내 아들이 나라의 일로 죽는다면 이는 국민 된 의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하자 일제는 큰 충격에 빠졌다. 안중근은 거사 성공 직후 러시아 제국 공안에 즉각 체포되어 하얼빈 영사관 지하 감방에 구금되었다. 일제는 거사의 배후를 추적한다. 안중근의 고향집까지 덮쳐 조마리아와 차남 안정근, 삼남 안공근에 대해서도 심문조사를 벌였다. 조마리아는 집요한 심문조사에서 일제 경찰로부터 갖은 조롱과 협박을 꿋꿋하게 이겨냈다. 

 

안중근은 러시아와 영국인 변호사가 변론을 자청하고 있음에도 한국인 변호사의 선임을 원한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일제는 한국인 변호사의 선임을 반대하고 이를 적극 방해했다. 그러나 아들의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인 변호사 선임에 적극 나섰다.

 

이 일로 일제 경찰과 헌병들이 수시로 찾아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한 것은 잘못된 자식 교육의 탓이라며 책임을 추궁했다. 조마리아는 그들에게 당당히 맞서 이렇게 항변했다. "내 아들이 나라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국민 된 의무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나 역시 아들을 다라 죽을 따름이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로다

1910년 2월 14일 법정은 안중근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렸다. 소식을 들은 조마리아는 이런 말을 전한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되고 만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른즉 죽는 것이 영광이다." 어머니로서 자식의 죽음을 비통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지만, 목숨을 구걸하기보다 의로운 죽음을 선택할 것을 바랐던 것이다. 

 

안중근은 2월 19일 어머니의 뜻을 따라 공소권을 포기했다. 안중근의 의연한 결정에 놀란 쪽은 일제였다. 고등법원장 히라이시는 일부러 형무소를 찾아가 그에게 상고를 권했다. 하지만 이미 결단을 내린 안중근은 단호했다. 감형을 염두에 두고 항소를 권하는 일본인 변호사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문과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시모시자(그 어머니에 그 아들)'라는 글을 실었다. 

 

안중근 의사
어머니가 만든 수의를 입은 안중근 의사

 

위대한 인물은 어머니가 만든다

위인의 성공 뒤에는 대게 어머니의 남다른 모성 리더십이 뒷밤침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조마리아는 아들이 가진 자질을 중시하면서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로 키웠다. 때로는 아들의 결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결연한 의지와 단호함도 보였다. 조국이 처한 운명을 타개하는 일에 있어서는 아들의 목숨일지라도 아까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보였다. 이러한 조마리아의 아들에 대한 리더십은 안중근을 민족의 별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조마리아는 여성독립운동가로서도 훌륭한 리더십을 보였다. 조마리아는 해외 망명 시절에 독립운동가들이나 교포사회에 분란이 생길 때면 명석한 판관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곤 했다. 이는 조마리아의 탁월한 중재 능력이 교포사회를 통합하는 지도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거나 동포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꿋꿋이 인내하며 봉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조마리아는 위대한 민족영웅의 어머니자 스승이었다. 또한 해외 망명지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 및 교포사회에 영향력 있는 여성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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