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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조선시대 사람들은 무슨 직업을 가졌을까?

by Amy_kim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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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은 무슨 일을 하면서 먹고살았을까?

조선시대 사람들의 직업
조선시대 사람들의 직업

조선시대를 떠올리면 농민과 어민, 상인과 무역상, 보부상과 주막에서 술과 안주를 파는 주모 등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다. 하지만 조선은 500여 년이라는 긴 역사와 수맥만의 인구를 가진 적지 않은 규모의 국가였다. 당연히 이 시대에도 다양한 직업들이 존재했다. 그중에는 오늘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직업도 있고, 명칭만 달라졌을 뿐 현재까지 남아있는 직업도 있다. 

 

역사 속의 직업들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사회와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직업의 탄생과 소멸은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매체의 영향으로 조선시대에 대한 내용을 많이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TV 속 조선시대 기생들은 단아하게 앉아서 거문고를 연주하거나 우아한 자태로 춤을 추지만, 실제로는 부끄럽고도 가혹한 일상을 살아가는 여인들이었다. 

 

그럼 조선시대의 직업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대신 울어주는 곡비

조선시대 장례행렬
조선시대 장례행렬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장례식장에 가면 통곡소리에 따라 상가의 수준을 평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례식 때 통곡소리가 작고 사람들이 적으면 유족들에게 화살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상주들은 곡을 하는 사람들을 고용했다. 곡비 또는 통곡비라고 불리는 여인들은 돈을 받고 초상집에 가서 울어줬다. 역사상 곡비들의 가장 큰 고용주는 바로 선왕의 장례식을 치르는 왕실이었다. 

 

숙종 때 사헌부 지평을 지낸 완산 판관 한영휘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시중을 들던 기생을 곡비로 썼다가 탄핵당했던 일을 보면 기생을 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실의 장례식 때 관비를 쓰자고 했던 대신들은 몇 년 후에는 사대부의 장례식 때 그 집안의 계집종에게 곡을 하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이대로 이뤄질 리 없어서 계속 저잣거리의 여인들을 고용했지만, 통곡하는 여인들의 통칭이 '곡비'가 된 것은 이렇게 계집종을 쓰도록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슬픔이란 것은 수치화할 수 없지만 체면을 중시했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장례식장의 통곡소리에 뒷말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고용하는 쪽을 선택했다. 

 

곡비로 나서는 여인들은 아마도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돈을 받는다고 해도 5일을 내내 장례를 지내면서 우는 걸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상조회사 직원들이 장례식을 치러준다. 돈을 받고 울어주는 사람이 사라진 대신 장례를 대신 치러주는 21세기판 곡비들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얼음으로 돈을 버는 장빙업자

조선시대 직업 장빙업자

혹자는 조선시대에 웬 얼음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위를 참을 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특히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음식이 쉽게 상했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 소금에 절이거나 얼음을 써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빈번하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 음식들이 상하는 걸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얼음이 필요했다. 얼음 수요가 막대했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한겨울에 얼음을 캐서 여름까지 보관해야 했다. 

 

얼음을 캐서 저장하던 임무를 맡은 군인이나 백성을 장빙군이라고 불렀다. 장빙군들은 한겨울에 한강변에 모여 각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 짚을 깔고 일을 시작했다. 한강에서의 얼음 채취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장빙군들이 캔 얼음을 저장하던 서빙고가 있던 둔지산 일대는 아예 서빙고동이라는 지역명이 붙어버렸다.

 

궁궐에 있는 내빙고를 제외한 동빙고와 서빙고가 모두 한강변에 위치한 이유는 캐낸 얼음을 최대한 빨리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전기에는 국가가 얼음을 채취, 관리하고 분배까지 책임졌다. 하지만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장빙군의 징발이 힘들어졌다. 아울러 한양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얼음 수요는 급증했다. 하지만 나라에서 채취한 얼음은 사용처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 사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채취해서 보관했다가 판매하는 사례들이 늘어났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기수

조선시대 직업 전기수

조선시대에 책은 쉽게 접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안정기에 접어들고 여항 혹은 이향이라고 불리는 저잣거리의 문화가 꽃을 피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책이 양반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중인과 평민의 벗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여서 책은 고가의 물건이었다. 그래서 서적 중개인이자 도매상인 책쾌가 등장했고, 비슷한 시기에 전기수가 본격적으로 선을 보였다. TV나 인터넷이 없던 조선시대에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주요 오락거리 중에 하나였다.

 

전기수는 소설들을 줄줄이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책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외워서 들려줬던 것이다. 주로 숙향전이나 심청전 등 잘 알려진 소설들을 들려주었다. 그들은 한 군데에 머물지 않고 날마다 자리를 옮겨 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같은 내용을 들려준다고 해도 사람마다 전달력에 차이가 나는 것처럼 유독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들려주는 사람이 있다. 목소리를 다르게 해서 마치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처럼 하거나 간단한 손짓발짓으로 그 장면을 상상하게 해 준다.

 

전기수는 이런 식으로 재미나게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돌연 중요한 대목을 앞두고 입을 다문다. 그러면 궁금해진 구경꾼들이 다투어 돈을 냈다. 돈이 어느 정도 쌓였다 싶으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런 방식으로 충분히 먹고살았던 것을 보면 전기수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얼마나 심취했는지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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