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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불꽃같은 소녀 유관순의 외침. 대한독립 만세

by Amy_kim 2023.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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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

식민지 교육하에 자란 첫 세대였던 열일곱 살 소녀, 그녀는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진실하게 자유를 향한 불꽃같은 삶을 살았으며, 정복당하지 않는 자유혼의 발자국을 뚜렷하게 남겼다. 

 

 

17세 소녀의 선택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덕수궁 쪽으로 다가오자, 많은 인파가 몰려있던 서울의 거리는 독립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시위대의 한 무리가 이화학당 교문 앞에서 일제히 소리쳤다. "이화 학생들도 나와라!" 토요일 오후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학생들이 교문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교문은 굳게 잠기고, 프라이 교장과 교직원들이 학생들을 막아섰다. 

"선생님, 대한은 우리의 조국입니다. 우린 우리나라를 위해 나가려고 합니다."

"학생들, 나가려거든 내 시체를 넘어 교문을 나가세요!"

이화학당 학생들은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느냐, 조국을 위해 자신의 작은 힘을 보태 행동하는 학생이 되느냐의 갈림길에 놓였다. 유관순은 네 명의 친구들과 담을 넘어 거리로 달려갔다. 운명적 결단이었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

유관순이 사는 지령리 어른들은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을 거사날로 정했다. 음력으로 3월 1일이었다. 총본부는 지령리였다. 연락원은 서울의 시위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참여한 유관순과 사촌언니 유예도가 맡았다. 하지만 유예도는 몸이 약해 유관순 혼자 연락 일을 담당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유관순은 3월 31일 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다. 각지 마을의 산봉우리에서 이에 호응하는 횃불들이 타올랐다. 4월 1일의 아우내 만세시위를 상기시키는 신호였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조인원 등의 지도자들과 함께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 앞에 섰다. 

 

아우내 장터의 시위운동은 제1시위와 제2시위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시위는 장터에서 평화적으로, 그 어떤 폭력을 행사하는 일 없이 평화적으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한 것이었다. 제2시위는 이러한 평화적인 시위운동에 일제 헌병이 무단 발포하여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격화되어 일어났다.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 운동을 전개한 역사의 현장)

 

감옥 안에서 만세를 부르다

감옥의 높은 담과 쇠창살, 그 안에서 가해지는 비인간적인 학대에도 유관순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유관순은 감옥 안에서도 수시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녀의 몸은 구타와 고문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럼에도 유관순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걱정했다. 유관순은 동생과 가족에 대한 걱정, 외로움과 배고픔, 육체에 가해지는 심한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슬픔에 잠겨 있지만은 않았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있는 방에서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옥 안에서 유관순이 선도하여 일으킨 옥중 만세시위는 3천 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호응하여 감옥 바깥으로도 시위가 퍼져나갔다. 유관순은 3·1 운동 1주년 옥중 시위날 갖은 구타를 당한 후 취침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유관순

유관순은 3월 1일 교문 앞에서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택했을 때 그 결정이 어떤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 유관순은 일본 제국주의의 거대한 국가 폭력적 힘이 육신을 가둘 수는 있으나 자유를 갈망하는 정신은 결코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관순이 감옥에서 얼마나 큰 고통 속에 죽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나 증언이 남아 있지 않다. 시위현장에서 입은 옆구리의 상처가 계속 유관순을 괴롭혀 온 데다 계속적인 구타와 고문으로 방광이 터져 몸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죄인이라고 치료는커녕 죽게 내버려 둔 감옥 당국의 처사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대정 9년(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 감옥에서 사망

-오빠 유우석의 호적부에 있는 유관순의 사망 기록

 

유관순 열사 수형기록표
1919년 서대문형무소 유관순의 수형기록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5천 년 문화민족이 어떻게 일본의 노예로 살 수 있단 말인가!"

법정에서 수없이 울려 퍼졌던 3·1 운동 참여자들의 당당한 주장은 바로 유관순이 정신이었고, 한국의 자존심이었으며, 한국의 오랜 역사와 문화의 빛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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